[영화/ 괴물] 쉬운 이야기.

(당연히...포스터 밑으로는 스포일러)

 2003년 <살인의 추억>을 보며 경외와 질투로 덜덜 떨었다. 봉준호 34살.
우리 사회 어디에 갖다 붙여도 다 성립하던 '구조적 모순'이라는 말을 이처럼 세밀하게, 이처럼 웃기게, 이처럼 새롭게, 이처럼 슬프게 보여준 영화가 또 있던가. 영화의 질에 대한 감탄이 경외를 끌어냈다면 마치 내 속에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내 정서까지 꿰뚫어본 듯한 세계관이 질투의 원인이었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정서와 세계관은 이만큼의 완성도를 갖고 형뻘 감독에게서 표현될 수 있구나. 그리고 기다렸다. 그 세세함을, 그 웃음을, 그 새로움을, 그 슬픔을.

2006년 <괴물>은 그 모든 기다림을 다 지고 있었다.



 

  그러나 <괴물>은 <살인의 추억>처럼 예상을 송두리째 벗어나는 영화가 아니라, 계속 한 발자국씩만 엇갈리게 걸음을 걷는 영화다. 장르의 규칙은 다 정해져 있으니 그걸 한 보 정도씩만 어긋나게 한다는 건 결국 관객에게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그래서 영화는 쉽고 재미있었다. 이것은 괴물로부터 딸을 되찾고 싶은 못난이 가족의 모험을 조금씩 새롭게 만든 이야기다. 관객을 감질나게 하다가 괴물을 등장시키는 공식 대신, 시작하자마자 뒤뚱뒤뚱 맛난 먹이 구하러 열심히 뛰어다니는 괴물. 납치된 아이는 결코 죽이지 않는다는 공식도 깨버리는 현서의 죽음. 도와주기는커녕 무시와 왜곡을 일삼는 공권력. 아무 능력 없는 못난이 가족이 괴물과 맞서 싸워야하는 아득함.

 그러면서 드러나는 공권력의 비열함이 영화 전체를 압도한다. 아득히 늘어선 끝이 없는 포름알데히드 병의 행렬. 똑같이 괴물과 맞서싸웠는데 미군 병사의 죽음엔 영웅의 칭호를, 강두의 현재진행형 싸움엔 바이러스 보유자의 도주라는 딱지를. 공권력을 사권력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무시하는 목소리, 목소리, 목소리. 경찰도, 군대도, 선배도.

 허나 많이 직접적이다. 미국은 구체적인 풍자 대상이다. 정보 독점에 정보 왜곡. 괴물과 몸으로 맞서싸우는 사람 이야기는 아무도 듣지 않고 괴물을 보지도 못한 미국의 정보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는 한국. 방역 작업에서도 뒷돈을 챙기는 공무원. 병원에서 빼내주고 한 가족의 전부를 요구하는 조폭 해결사. 모두 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권력과 사람들을 겨냥한다. 그래서 조금 당황스럽다. <살인의 추억>에서 은근했던 묘사와 풍자와 유머와 슬픔은 모두 가시적이고 직접적인 것으로 변했다. 미국과 공권력은 나쁘거나 방해만 되고, 가족은 딸 때문에 슬프다. 그 와중에서 이 모자라기 그지 없는 가족들은 서로 먹을 것을 챙겨주는 일 말고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 적의 실체는 말 그대로 괴물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기막힌 설득력을 갖고 진행되지만, 기의와 기표가 중간 단계를 별로 거치지 않고 바로 만나는 모습은 <살인의 추억>의 내공으로 인한 감동보다는 조금 밀도가 낮은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밀도가 낮은 게 어쩌면 더 자연스럽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맞서 싸워야 할 실체가 없었다. 경찰병력 지원나가야 하는데 데모 진압 중인 옆 경찰서가 나쁜가? 데모하는 학생들이 나쁜가? 잡아야 할 범인은 누구인가? 과학 수사와는 동떨어진 촌 형사들이 나쁜가? 아니면 형사들의 모든 노력을 간단하게 수포로 돌리는 미국에서 온 문서의 무심한 글줄이 나쁜가?...... 터널 안으로 용의자가 사라지면서 거대한 비극만 남고 맞서싸워야할 실체는 흔적만 보인 채 사라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애절해하고, 더 슬퍼하고, 더 상상을 펼쳤다.

 <괴물>에선 말해야 한다. 지금 이 땅에선 이게 문제라고. 문제의 실체를 감추는 일보다 문제의 실체를 드러내는 게 더 어렵다. 보는 사람들 때문에 더욱. 감췄을 때는 저마다 자기 입맛에 맞게 상상하고 즐기지만 드러냈을 경우는 이런 저런 볼멘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괴물>은 제 갈 길을 간다. 한강에서 괴물이 나타나는 류의 사건이 일어날 때,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들이 어떻게 자기의 속성을 드러낼지 감독은 자기 나름대로 꿰뚫고 있었다.

  나는 이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면서 이번엔 힘이 빠져버렸다. 그래, 잘도 공식을 한발자국씩만 배반하면서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관을 꾹꾹 눌러담았구나. 그런데도 받아들이기는 이토록 쉽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분향소에서 가족의 오열에 이어지는 언론사들의 사진 촬영이었다. 감정이 복받쳐 올라 눈물이 찔끔 나다가 바로 실소가 터지는 세계. 눈물을 흘리면서도 배두나의 말려 올라간 옷자락 밑으로 드러나는 살결에 언뜻 눈길을 주게 되는 본성, 오열하면서도 그 옷자락을 내리는 아버지. 언제나 모순되는 두 가지 이상의 감정이 혼재하는 세상살이. 그 두 개의 세계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능력.

 <괴물>에 대한 내 불완전 연소는 영화의 장면 장면이 단일한 감정을 요구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ps1.예전이라면 100번 공감했을 미국과 미군에 대한 묘사가 무척 현실적이면서도 조금 간지러웠던 건, 쉽게 이야기했기 때문일까 내 현실인식이 변했기 때문일까. 

ps2. 한강 다리 밑을 달리기로 혹은 자전거로 지나며 비밀스런 다리 밑 공간에 대한 으스스한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상상해보곤 했는데...... 내 빈곤한 상상력에 헛웃음이 나게 했던 영화였다.

 

 

by 탄이 | 2006/07/29 01:54 | 영화 | 트랙백(3)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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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렉시즘(rexISM).. at 2006/07/29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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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紅 柱 堂 at 2006/07/30 00:50

제목 : 괴물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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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물빛바람 at 2006/07/29 02:23
괴물 참 재밌게 봤습니다. :) 글 잘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cactus at 2006/07/29 04:05
좋은 감상평 잘 읽고 갑니다. 정말 재밌는 영화였습니다.^^
Commented by Hong at 2006/07/29 12:09
이게 뭐라 말하기 어려운 것의 결과물이더냐ㅋ 암튼 잘 읽었어요~^^

ps.근데 하도 봉테일봉테일 하다보니 새삼스레 기억나는거
"여의도에 사는데 당산여중 다니는구나"
"저 명찰은 완죤 우리 중학교때꺼랑 똑같은걸?"
그리고 가족들이 잠깐 생업까지 버리고 열광하게 만드는 딸내미의 직업은 축구선수도, 야구선수도 아닌 양궁선수더라는 것.

근데 정작 "배두나의 말려 올라간 옷자락"은 못봐버렸어.ㅠㅠ
Commented by 탄이 at 2006/07/29 15:35
Hong/
맞아 초록색인거까지 우리 학년이랑 똑같았어!!! 그게 당산여중 교복이었구나;
내가 못 본 디테일 중에 이런 것들이 있다더라
1. 박희봉의 발가락 양말
2. 분향소 화환 중에서 '대구 지하철 참사 유가족 일동'이라는 명찰
3. 박강두가 컨테이너 병실 문을 열었을 때, 바베큐 파티를 진행 중이던 미군 뒤편에 소변보던 병사
등등등...... 이 영화는 디테일 찾는 재미 때문에라도 다시 보거나 소장하고 싶다.^^

같이 본 사람이,
현서가 나가서 제일 먹고 싶은 것이 맥주라고 그랬을 때, 맨 처음에 나 맥주 먹으면 안돼라고 했던 것과 이어져서 '아...쟤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하겠구나' 하고 알았대. 여러가지로 치밀한 봉테일 씨.
Commented by 탄이 at 2006/07/29 15:36
물빛 바람, cactus/ 방문자가 극소수의 친구뿐인 외로운 블로그에 와주셔서 감사해요.^-^ 괴물 참 재미있죠?
Commented by 포비 at 2006/07/29 19:20
'제 갈 길을 가는' 영화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사실, 어떤 타이틀을 붙여도 될만한 영화, 그래서 어느 타이틀에도 어울리지 않는 영화인 듯. 전 사람을 쫓아다닐 때 미끄러지고 뒤집어지고 허둥지둥하는 괴물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마지막 휘발유 씬에선 가슴이 아팠다는...=.=;
Commented by 탄이 at 2006/07/30 01:26
포비/ 그러게요. 그 놈도 외롭고 불쌍한 녀석인거죠. 좋다고 받아먹고 있는데 그 때문에 온몸이 불타버리고...
Commented by turtlebar at 2006/07/30 01:50
1.
미국과 한국 공권력의 무도함은 차치하고
(직설적이었죠^^그치만 메이저 영화의 이런 묘사는 반갑기만 하네요)
그림을 하면서도 배우는 것이 톤의 단계를 많이 쪼갤수록 많은 감정을 담을 수 있다는건데
매 한 걸음씩만 다르게 걸어줘도
그렇게 끝을 채우면 가지 않은길을 도탑게 경험키도 한다는 것,
이 영화에선 그런 즐거움이 있는 것 같아요.

영화 문법에서도 그것이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여러모로 <살인의 추억>에서의 먹먹함보단 <괴물>의 암암함이 마음에 드네요-

말없이 밥을 챙겨주던 가족 식사가
행복한 밥 한 숟갈 떠넣는 아이에게로 이어질 때의 느낌...
포슬포슬하니 산뜻했어요.

2.
자주 이용하는 2호선 지하철 안-
앉아서 가려고, 혹은 빨리 가려고 말없는 작은 투쟁을 하던 서울 사람들이
한강 다리위를 지나가기만 하면
뭔가 묘한 눈빛으로 각자 창밖을 바라보죠
개개인의 판타지에 대한 향수가 느껴져요
이제 그 사람들은
한강다리를 지나면서 섬뜩섬뜩한 판타지를 추가하겠군요^^
Commented by 탄이 at 2006/07/30 23:32
계속 다시 보기엔 괴물이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해요. 디테일, 볼거리, 호흡이 더 상업영화 답다고나 할까. 살인의 추억은 확 치고 나가기보다 아무래도 '스멀스멀'하는 기분이니까. 하지만 본 직후에 멍멍한 충격은 <살인의 추억>이 훨씬 컸답니다. 아마 전혀 아무런 기대도 정보도 없이 봐서였을 거에요.

맞아요. 지하철이 지상으로 나와 다리를 건널 때. 그 때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간이죠. 누구나 한 번쯤 고개를 들게되는.

Commented by at 2006/08/05 23:20
오늘 괴물 보고 글 읽었다. 네가 말한 디테일 중 본 것이 단 한 개도 없다니! -.-;
Commented by 탄이 at 2006/08/06 00:46
ㅋㅋ 나도 못 본 디테일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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