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겠지요. 8월에 올렸던 KBS관련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마무리 글을 한 번쯤은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뜨거웠던 여름, MB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KBS의 사장을 갈아치웠고, KBS는 경찰의 난입과 내부 분열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는 듯’ 현 사장의 탈법적 해임과 새 사장 선임이 이루어졌고, 제작 일선에 있던 PD와 기자들, 비판적이었던 직원들은 각종 인사발령으로 주변부로 쫓겨났고 <시사투나잇>, <미디어포커스>등의 프로그램은 폐지되었고 라디오엔 결국 MB의 연설 방송이 편성되었습니다. 권력을 가지면 마음에 안 드는 걸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는 것이 새로운 상식이 되었고, 절차와 논리가 옳지 않더라도 권력으로 점거한 순간, 인정하고 굴종해야 한다는 것이 다시금 진리로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그 서슬 퍼렇게 투쟁하겠다던 방송인들은 무엇을 한 걸까요? 그저 무력하게 피켓을 든 게 다인 걸까요.
12월 초에 KBS노동조합 선거가 있었습니다. 지나친 의미 부여일 수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의미 있는 변화는 이 선거로부터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지난 9월, 전국 언론노조가 총파업 투표를 실시해서 압도적인 찬성을 얻었음에도 흐지부지 지나갔던 것은 KBS가 전국 언론노조를 그 시점에 탈퇴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언론노조 내부의 갈등의 결과였던 이 탈퇴로 인해, 언론노조는 가장 큰 인원을 가진 조직을 잃어버렸고 KBS 내부의 갈등도 정점에 이릅니다. 사장 문제를 비롯하여 너무나도 권력 영합적인 노조의 행태에 분노한 KBS 사원들은 ‘사원행동’이라는 임시 단체를 만들고 언론인으로서의 입장을 피력하지만, 엄청난 ‘배후론’, ‘색깔론’에 시달리게 됩니다. 막가파 개편도, 막가파 인사도, 그저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노동조합이 아닌 ‘임시단체’의 운명이지요. 그래서 KBS의 많은 직원들은 간절하게 11월 말의 노조 선거를 기다렸습니다. 힘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과연 노동조합 선거가 그리도 중요한가. 어떤 투쟁도 노동조합 없이는 성공할 수가 없더군요. 회사는 피켓을 드는 사원들을 비디오로 채증하면서 ‘근무태만’으로 처벌할 기회만을 기다리는 듯, ‘근무지 이탈’을 처벌하겠다는 식의 공문을 내려보냈죠. 개편과 편성이요? 피켓 시위, 집단 본부장 면담, 들불같은 성명, 무슨 짓을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전날까지도 ‘정해진 것이 없다’라는 대답이었고, 다음 날 계획된 대로 실행해버리는 식이었죠. YTN 사태도 KBS 노동조합이 전국 언론노조에 힘을 실어 연대 투쟁을 했더라면, 생각보다 빨리 정리될 수도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합법적 투쟁을 위해 노동조합은 꼭 필요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시사투나잇> 이야기를 해봅시다. KBS라는 언론사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예이니까요. 현 정권이 보기에 제대로 ‘사고’를 친 건 MBC의 <PD수첩>이었지요. 하지만 MBC 사옥에는 아직도 <PD수첩>을 변호하는 현수막이 붙어있고,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시사투나잇>도 정권 입장에선 꼴보기야 싫었겠지만 <PD수첩>같이 결정적 어퍼컷을 날린 것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시사투나잇>은 KBS 내에서도 없애야 한다는 갖은 공격에 시달렸습니다. 경영임원진은 ‘편향되었다’는 신화를 끝내 뒤집어 씌워 일선 제작진과 광범위한 PD들의 저항에도 아랑곳없이 폐지합니다. KBS, MBC 양 사의 시사PD들이 씁쓸한 위로를 주고 받는 와중에도, 그런 차이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희망이 있었습니다. 많은 조합원이 노조에 염증과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고, 대안으로 출마한 사원행동의 일원이었던 모 후보는 공영방송의 정체성과 운영에 대한 해박한 전망과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1차 노조 투표에서 과반이 넘진 못했지만 (4팀 중) 1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1차 투표의 2위 팀이 문제였습니다. 현 노조의 부위원장이 위원장 후보로 나온, 현 노조를 계승하는 이 후보는 두 가지 키워드를 사용했습니다. ‘구조조정’과 ‘반PD정서’. 첫 번째 키워드, 구조조정. 자기들이야 말로 (사장과 친하기 때문에?) 구조조정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 두 번째 키워드, 반PD정서. 1위 후보가 PD 출신이었는데, PD들이란 가뜩이나 적자인 회사에서 제작비를 쓸 궁리나 하는 작자들이고 비리의 온상이다, 라는 흑색 선전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2위 팀의 위원장 후보는 KBS 내 4100여명 중 1400여명을 차지하는 기술인 출신이었고, PD는 800여명입니다. 기술본부장까지 나서서 직종 감정을 부추기고 사내 메일로 기술인이 이겨야 한다는 식의 설득 메일들이 돌았습니다.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직원들에 대한 감언이설. 지역총국들의 구조조정에 대한 불안. 그리고 때마침 흉흉했던 몇몇 비리 PD들의 구속 사태. 이 모든 것이 맞물려 2차 투표일이 되었습니다.
95.7%의 투표율, 50.1%와 48.5%. 4100여명 투표자 중 66표 차이.
역전. 현 노조를 계승한 후보가 승리합니다. 그렇게, 뜨거웠던 KBS의 여름과 가을은 직종감정과 구조조정의 위협에 스러지고 맙니다. 이 징후들은 대한민국의 징후와 너무 똑 같아요. 지역감정, 경제를 살리자, 그리고 노무현(정연주)은 좌빨.
95.7%라면 휴가자나 부득이하게 투표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음을 감안할 때, 거의 모두가 최선을 다해 투표했고, 양 후보가 워낙 달랐기에 회사가 두 동강 났다고도 볼 수 있는 결과입니다. 같은 하늘을 이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KBS라는 이름 아래 동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칼날은 MBC를 향해갑니다. MBC의 저항도, 털어서 나오는 먼지를 빌미로 압박하기 시작하면 버티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방송의 보수화와 연성화, 자본화는 빠르게 추진되겠지요. MB당선 시 짜여 졌던 시나리오와 한 치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하는 이유는, 정당성과 명분, 논리와 실력을 갖추었다는 것과 선거에서의 승리는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MB시대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하여도, 모두들 못살겠다고 하는 것 같아도, 다시금 ‘그렇다고 잃어버린 10년으로 돌아가잔 말인가’ 라는 식의 편 가르기로 권력이 계승될 수 있습니다. 그냥 4년을 참는다고, 혹은 적극적으로 분노하며 4년을 보낸다하여도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죠.
어쨌든 방송도 세상도 계속되겠죠. 그저, 이 정도의, 잘못 묶인 듯 보이는 매듭이 있었다는 걸 알려야 할 것 같아서요.
노조 선거 결과의 충격에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의 한 대화를 옮겨봅니다.
- 뜻 있는 사람들이 이기적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구조조정을 막다가, 의미 있는 투쟁도 못해보고 해직 당하고 끌려가는 것을 보느니, 이게 나을지도 몰라. 그들이 발등을 찍는 것을 그저 지켜보는 게. 물론 그 발등이 우리 발등이기도 하겠지만.
-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공간만큼이라도 이곳을 제대로 ‘점거’하고 있는 것이, 이곳이 나빠지는 것을 막는 현재로선 유일한 길일지도 모르겠네요.
# by | 2008/12/23 22:17 | 뉴스비평 | 트랙백(2)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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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app의 생각
뜻 있는 사람들이 이기적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구조조정을 막다가, 의미 있는 투쟁도 못해보고 해직 당하고 끌려가는 것을 보느니, 이게 나을지도 몰라. 그들이 발등을 찍는 것을 그저 지켜보는 게. 물론 그 발등이 우리 발등이기도 하겠지만....more
제목 : Rayna의 생각
“MB시대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하여도 … 다시금 ‘그렇다고 잃어버린 10년으로 돌아가잔 말인가’ 라는 식의 편 가르기로 권력이 계승될 수 있습니다. 그냥 4년을 참는다고, 혹은 적극적으로 분노하며 4년을 보낸다하여도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죠.”...more
Hong/ 뭐...... 이젠 그럭 저럭 무감각해졌어. 내 분야가 시사교양PD가 아닌게 너무 아쉽다가, 너무 다행이다가 하는 나날들이다.
한때 수준높은 다큐 때문에 나름 좋아했었는데..
훗날 역사에 부끄러운 순간으로 기억될 겁니다.
탄이님.. 애도를.. ㅜㅜ